환대를 사유하다 강의 요약 1강 사람됨의 조건 : 2020. 11. 7. 14:00-16:30 2강 유대와 배제의 메커니즘 : 2020. 11. 21. 14:00-16:30 3강 전망과 탐색 : 2020. 11. 28. 14:00-16:30 환대라는 행위는 애초부터 긴장을 내포한다. 질문을 던져 보자. 조건부 환대는 환대일까, 아닐까? 장애인에게 당신이 시설에 거주한다는 조건으로 환대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겠는가? 조건 없는 절대적 환대만이 환대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런데 여기에도 모순이 있다. 나를 해치는 사람까지 환대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 이중의 모순으로부터 환대의 모험이 시작된다. ‘절대적 환대’의 실질적 의미를 캐어 들어감에 따라 우리는 환대가 ‘침해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킬 권리’와 관계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나아가 타자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문을 활짝 열어주는 절대적 환대의 이상과,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두르는 조건부 환대의 현실 사이에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없었던 수많은 선택지를 고안하고 창안해내기! 환대는 우리에게 예술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환대의 모험은 필연적으로 사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성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환대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을 상상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배제된 사람들을 떠올리게 되니까 말이다. 배제를 배제하기. 타자들의 무한히 많은 시선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다중성의 시점을 공유하기. 이 강의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여 이 시선들의 교차점들에 놓아보는 사유 실험을 시도해 보았다.
lecture_01_환대를_사유하다_요약_2020.txt#1209
"[…] 세탁기는 분명히 우리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지만 고장난 세탁기를 다루는 경우에는 세탁기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물어야 한다. 그런 순간에 기술(technology)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을 확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자기도취에 대한 모욕이다. 끊임없이 자기확인을 하는 자기도취자는 만물을 자신의 의지가 확장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주 터무니없이 물질의 세계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한다. 자기도취자는 마술적인 생각과 전지전능의 망상에 빠져들기 쉽다. 반면 수리기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며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수리한다. 수리기사는 실제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물건들에 더 확실한 통제력을 발휘한다. […] 수리기사는 작업을 할 때마다 항상 머리를 비우고 감각적으로 그 대상을 살펴야 한다. 고장난 기계의 상태를 세심히 살펴보고 소리도 주의깊게 들어보아야 하는 것이다." (매튜 B. 크로포드, ⟪손으로, 생각하기⟫, 윤영호 옮김, 사이, 2017.) 나는 항상 기술을 행위하는 일이 우리를 깨어있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해준 문장들을 오늘 만났다. 덧붙이자면, 이 단락이 실려 있는 부분의 섹션 제목은 “세탁기 하나 고치지 못하는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의존적이다”이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제목이다. 오늘 나는 에어컨이 고장난 집에서 8월 20일에 출장 예약된 수리기사를 기다리기보다는 아예 마음을 비우고, 선풍기 바람을 쐬며 최근에 구입한 맥미니에 설치한 노션(notion)으로 작업 계획을 체크하면서 스크리브너(scrivener)로 글을 쓰고 있다. 8월에 무에어컨 선풍기 + m1 탑재된 맥미니 + 노션 + 스크리브너.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해보는 조합이다. 이게 의외로 상당히 이상에 가까운 노동 환경인 듯하다.
reading_20210805_01.txt#1210
'힐링'이라는 단어에 대해 처음부터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새 나도 모르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애초에 가지고 있었던 반감이 얼만큼 구체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었는지 잘 생각나지도 않는 상태에서, 매튜 크로포드의 ⟪손으로, 생각하기⟫를 읽다가 의외의 명쾌한 한 가지 실마리를 만났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미술공예운동(The Art & Crafts Movement)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이다. 미술공예운동은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으로 인해 심미적, 윤리적 저하와 타락이 일어났다고 판단하고, 이에 반발하여 수공예적 생산방식으로 생활제품을 생산하고 공급하려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자기재생(self-regeneration)’이라는 치유적 윤리와 쉽게 어우러지면서, 중상류층에서 널리 인기를 얻은 일종의 반모더니즘 경향의 한 갈래를 형성했는데, 저자는 사실 여기에 모순이 있었다고 말한다. "[…] 가장 큰 모순은 기계에 반발하는 미적 저항의 반모더니즘 정서가 후기 근대문화의 바람직하지 않은 특징들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광고인들이 정신적 중독의 수단으로 애용하는 치유적 자기도취, 진정성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바로 그런 특징들이다. 이처럼 고상하고 상징적인 공예작업과 공예소비의 형태는 일상화된 관료적인 작업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자 그에 대한 순응을 나타냈다." (매튜 B. 크로포드, ⟪손으로, 생각하기⟫, 윤영호 옮김, 사이, 2017.) 어제 원정씨와 얘기한 내용이 여기에 연결될 수 있을 것 같다. 원정씨의 아이디어를 정리해본다면, 이 소비주의의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 손을 쓰기보다는 남의 손을 빌리려 하고, 자기 손을 쓴다 해도 ‘원데이클래스’와 같은 일회적으로 구성된 ‘체험’ 상품의 틀 안에서다. 소비주의의 피로감과 허망함은 우리에게 보상을 욕구하게 하지만, 그 보상조차도 사실은 체제에 대한 순응일 뿐이다.
reading_20210805_02.txt#1211
매튜 크로포드의 ⟪손으로, 생각하기⟫ 3장에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자동차를 수리하러 갔다가, 그 오래된 차에 그 정도의 수리비를 들이느니 차라리 차를 바꾸는 것이 낫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에게 그 말을 한 것은 정비사가 아니라 상담원인데, 전문적인 정비 지식을 갖추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이 상담원의 의도는 어쩌면 단지 새 차를 판매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주는 이 정비-딜러 회사에 대해 신뢰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기 차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들에게 의존하는 일만큼은 절대로 피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결국 집으로 돌아와 직접 엔진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다음은 거기서 이어지는 문장들이다. “어쩌면 그는 밸브 트레인을 다시 원상태로 조립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해볼 작정이다. 이런 당당한 기개는 ‘자기 물건의 주인’이 되려는 열망을 통해 탐구정신과 연계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랑스러운 ‘자립’의 근간이다. 간혹 이런 자부심은 깊게 생각하면 자신의 이익과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령 사람들은 자동차를 직접 수리하는 데 따른 기회비용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은 대체로 이런 자부심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기회비용의 개념은 인간의 경험이 ‘대체’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그것들이 시계 시간이라는 추상적 통화로 단순화될 경우에 동등하게 취급되거나 서로 교환될 수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확장하는 경제학의 영향력에 맞서 우리는 당연히 자신이 직접 체득한 것, 소위 ‘인간 경험의 특수한 이질성’을 고수해야 한다. […] 경제학은 오직 특정한 가치들만 인정할 뿐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들은 인정하지도 않는다. [직접 자신의 자동차를 수리해보겠다는] 기개는 자신의 위엄을 확실히 드러내는 것이며, 자신의 자동차를 직접 수리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동차,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매튜 B. 크로포드, ⟪손으로, 생각하기⟫, 윤영호 옮김, 사이, 2017.)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 이처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적은 거지? 이 부분에 대해 긴 주석을 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 읽어나가면 ‘물건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갖는 모순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부분도 중요한 내용이지만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내가 하려는 일이 바로 이 “시간, 사물, 자기 자신에 대한 다른 경험”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하는 것, 이 경험 자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 경험이 가지고 있는 차원들을 탐색해보고, 그 시간의 질감과 결을 나타내보이는 것.
reading_20210806.txt#1212
“전통적인 실기 직종별 공동체에서는 기능이 대대로 전수되는 탓에 기능 자체가 아주 경직됐을 거라고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 예로 고대의 도자기 제작은 점토를 받치는 데 회전돌판이 도입되면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새로운 점토 성형 방식이 속속 뒤따랐다. […] 우리 생각에는 요리사든 프로그래머든 훌륭한 장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열중한다고 짐작하기 쉽다. 즉 주어진 과제의 해결책을 찾아 문제를 마무리하는 게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에 임하는 장인의 입장에서는 일을 일 자체로 중시하는 태도가 아니다. 리눅스 공동체 네트워크에서는 ‘버그’ 하나가 제거될 때마다, 전에 없던 코드 활용 방법이 새로 등장할 때가 많다. 코드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지, 마무리돼서 고정되는 대상이 아니다. 리눅스 세계에서는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찾는 일이 거의 순간적으로 이어진다.” (리처드 세넷,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2010, 53-54쪽.) 생각이 풀리지 않아 이것저것 뒤적이다가 타로 카드 점을 봤더니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워 옛것에 천착하는 것이 문제라는 풀이가 나왔다. 타로 점이 수만가지 상황에 적용되어 해석될 수 있는 건, 문제 상황이라는 것이 어떤 상황이든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원고 집필이든 사업 문제든 관계 문제든 작업상의 기술 문제든. 새로운 시야를 가지려면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가 어떤 ‘버그’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일은 버그를 제거하는 일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버그는 영원히 제거되지 않을 것이고, 나는 영원히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것이다.
reading_20210808_01.txt#1213
“[…] 인터넷상의 리눅스 작업 공간에서는 [aristotle@mit.edu]라는 이름의 참여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아낼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aristotle@mit.edu]가 토론에 기여하는 내용이다. 상고시대 장인들 사이에도 이와 유사한 비인격성이 있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데미오에르고이를 지칭할 때는 번번이 그들이 하는 직업을 이름처럼 불렀다. 실제로 이런 비인격성은 모든 장인의식에서 중요한 요소다. 작업의 질을 따질 때 이게 누구의 작업이냐는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면, 장인의 일에 타협과 관대한 처분이 통하기 어렵다. […] 영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어느 리눅스 대화방에 나도 가입해 있는데, 영국 특유의 정중한 격식과 우회적 표현들이 없어졌다. ‘저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텐데요’와 같은 말투가 사라졌고, 그 대신에 ‘이 문제는 정말 개판이다’라는 식의 말투가 생겼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같은 비인격성에 바탕을 둔 직설적인 문화는 사람들을 외향적으로 만든다.” (리처드 세넷,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2010, 55쪽.) 이 문단은 작업자들의 ‘비인격성’보다는 그들의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한 직접적 소통의 문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비인격성과 평등주의는 상당히 다른 출발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길게 이야기해보고 싶다.  리처드 세넷의 다른 책에서도 느낀 점이지만, 그는 굉장히 적절한 좋은 소재들을 제시하고 있지만 뭔가 가장 중요한 점을 관통하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많다. ‘장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craftsman이다. 맞는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역시 낯설다. 현대 우리말의 일상어에서 이 단어는 ‘장인정신’이라는 표현에서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작업자도, 노동자도, 기술자도, 수공업자도 아니다. 이처럼 또렷한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에게 낯설다는 사실 자체가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어떤 단어가, 어떤 개념이 자연어에 없다는 것은 곧 그러한 관념을 다루는 담론이 그 사회에 없다는 것이거든. 
reading_20210808_02.txt#1214
취미로 미싱을 하다 보니 스스로 패턴을 그려보고 싶은 순간이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운 좋게도 제 때에 기회가 생겨서 상의 기본형으로부터 티셔츠 패턴을 도안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전지를 구입하고 제도용 샤프, 자, 지우개, 잘 드는 사무용 가위를 갖추고서, 소매 넓히기라든가 기본형 소매를 래글런 소매로 바꾸는 법 같은 것들을 배웠다.  이후에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패턴 그리는 법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취미 이상으로 하지 않는다 해도, 그걸 배워두면 분명 써먹을 일이 많을 것 같았다. 자꾸 말려들려 하는 종이와 씨름하지 않아도 되고, 오랫동안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하지 않아도 되고, 반복해서 선을 긋고 지울 때마다 지저분한 지우개 가루를 쓸어담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도 PDF 파일로 다운로드 받은 패턴들을 손쉽게 마음대로 수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을 두고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나는 배우지 않기로 했다.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컴퓨터로 패턴을 그리는 기술이 내게는 실질적으로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패턴 제도의 기초를 아주 조금밖에 학습하지 못한 탓에, 나는 패턴 수정을 할 때 수치나 형태에 대한 ‘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법칙대로 치수와 각도를 적용하더라도, 실제 크기로 그려서 몸에 대어 보아야만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니까 모니터 안의 도형들만으로 뭔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의 사용법을 익히는 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에서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문단을 만났다. 저자는 CAD가 건축설계 교육에 처음으로 도입되어 수작업 도면을 대체하게 됐을 때 한 젊은 MIT의 건축학 교수가 말한 것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건축현장을 그리고, 그 위에 선과 나무를 그려넣으면서 우리 마음속에 이미지를 새기게 된다. 이것은 컴퓨터로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대상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도면에 그리고 다시 그려보면서 그 공간을 알게 되는 것이지, 컴퓨터가 우리 눈앞에 ‘재생’해준다고 해서 알게 되는 게 아니다.’ 이러한 지적은 예전 방식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컴퓨터 작업이 도입돼서 실제로 도면을 그리는 작업이 사라질 때 사람들 머릿속에서 상실되는 게 무엇인지를 지적해주는 말이다. 여타 시각적인 실습과 마찬가지로, 건축 도면의 스케치는 윤곽을 그려가면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위다. 그 과정에서 손으로 윤곽을 좁혀가고 다듬음으로써, 건축 설계자는 테니스 선수나 음악가가 연습하듯 작업을 진척시키고, 작업대상에 깊숙이 몰입하며, 그에 대한 생각을 완성해간다. 이 건축학 교수의 말대로, 건축현장이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리처드 세넷,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김홍식 옮김, 21세기북스, 2010, 74-75쪽.) 이 문단은 작업의 반복이 가져다 주는 효과에 대해 사색하는 부분에서 전개된다. 작업하는 사람과 학습하는 사람은 반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때 일어나는 일은 문제를 해결하고 새 지평이 열리고 또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되풀이되는 것이다. 기능이건 지적 능력이건, 한 사람이 어떤 능력을 습득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기계에 전적으로 의존해서는 안 될 이유를, 그리고 '남의 손’이 아니라 ‘내 손’을 써야 할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reading_20210808_03.txt#1215
자기 손을 써서 무엇인가를 해나가는 일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잡다한 도구로 가득 찬 도구함이다. 물론 이것은 분야에 따라 다종다양하다. 망치와 드라이버가 든 공구함, 바느질 상자 또는 노루발 박스, 다양한 크기의 뒤집개와 국자가 걸린 싱크대 위의 걸이대, 붓과 연필과 나이프와 물감이 든 화구상자, 빗과 가위와 면도기가 든 이발사의 서랍, 치과의사의 연장 선반, 수술의의 메스 트레이…… 도구함의 이미지는 기술(technique) 자체의 이미지이다. 내 상상 속 도구함들은 하나같이 깨끗이 분류가 되지 않는 수많은 도구들로 넘쳐난다. 치과의사나 외과의사 같은 예외적인 ‘프로’들이 있기는 하지만, 선무당 단계에 있는 초중급 기술자의 도구함은 물론, 새로운 실험을 거듭하는 예술가의 도구함, 수없이 쓰고 던져놓기를 거듭하는 기계 정비사의 도구함은 깔끔하고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리처드 세넷의 책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기술, 리듬과 의례를 배운다는 것”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몹시 흥미로운 부분이 있는데, 주제가 주는 혜안과는 달리 글 자체는 조금 맥이 빠지기는 하지만, 여기 제시된 기술의 이미지는 상당히 재미있다. 내가 도구함으로 표상하는 이미지가 여기서는 화살통(quiver)으로 나타난다. 화살이 빽빽이 들어차있는 화살통에서, 궁사는 손쉽게, 그러나 주도면밀하게 바로 지금 쏘아야 할 화살을 고를 것이다.  “‘통’이라는 것은 기술 발달에 관한 중요한 이미지이다. 사람들은 간혹 기술적으로 숙련된다는 것이 어떤 과제를 실행할 올바른 방법 한 가지를 찾아내는 것이며, 따라서 수단과 목적 사이에는 일대일 대응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보는 법을 배우는 것까지 포함해야만 더 충실하게 발달해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통이 여러 가지 기술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복잡한 문제를 완숙하게 다룰 수 있다. 한 가지 옳은 방법이 모든 용도에 다 들어맞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리처드 세넷,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김병화 옮김, 현암사, 2013, 321-322쪽.) 장인들이 수없이 많은 도구들로 각자의 도구함을 채워야 하는 이유, 결코 그들이 자신의 도구함을 타인과 공유하지 않는 이유, 자기 손으로 작업하고자 하는 초보자가 가장 먼저 부딪치는 어려움의 정체는 모두 도구함과 관련이 있다. 지난 번 글에서 장인들의 ‘비인격성’에 관련하여 리처드 세넷의 입장에 반대한다고 했는데, 도구함-화살통의 이미지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듯하다. 
reading_20210810.txt#1216
“어떤 종류의 질서든 그것은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 인간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는 것은 변하기 쉽고 예상할 수 없으며 제멋대로인 것들, 다시 말해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을 믿을 수 없고 창조력이 불충분한 것처럼 보이고 상징성이 혼란과 모순을 낳게 할 때면 언제나 맹목적인 ‘운명’에서 도피처를 발견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주관적인 관심들을 직접적으로 포괄하지 않는 과정들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의 정신의학자들은 최근 옷감짜기와 같은 기계적 과정이 순수한 치유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옷감짜기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전형적인 기계적 질서로 남아있는데, 그 까닭은 일단 날줄 위에 씨줄을 던지는 일에는 오로지 최소의 자유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질서정연한 작업과정을 따른다는 것은 기술이 인류에게 부여한 적지 않은 은혜였다.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려는 자발성, 자연환경의 힘이나 소재를 어리석은 미신에 의존하지 않고 처리하려는 자발성과 더불어, 규칙성과 반복은 물론 엄격한 표준화에서의 비인격적 질서를 자진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학습은 인간의 자기도취와 자애, 자유로운 공상과 환상, 자의성 및 허영심과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행이 매우 완만했다 할지라도 모든 시대들에 어떤 상식의 축적을 남겨놓았다. 즉 쇠를 녹이려면 불에 공기를 더 불어넣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쇠가 녹지 않을 것이라든지, 흙항아리를 잘 구워내려면 흙을 충분히 반죽해야 하며 거품이 남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느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객관적 조건에 관한 인식은, 이러한 지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었을 뿐 아니라, 상징성에 대한 인간의 빠른 숙달이 인간을 위해 파놓은 함정 - 즉 이미지와 언어라는 이 위대한 마술적 도구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인간이 자연의 과정을 직접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 - 으로부터 인간을 차차 해방시켜주었을 것이다.” (루이스 멈포드, ⟪예술과 기술 Art and Technics⟫, 김문환 옮김, 민음사, 1999, 58-59쪽.) [문장을 읽기 쉽게 고쳤음.] 이 책은 1952년에 씌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이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 이전에 기술을 주제로 씌어진 책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신박한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 사뭇 긴가민가하면서 이 고전적인 문체의 글을 읽어나가다가, 최근에 씌어진 책에서 본 것과 동일한 입장을 발견했다. 기술이 인간을 망상과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고보니 새삼스럽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기술문명을 받치고 있는 축에 속해있는 것 같다. 단지 사람들은 기술을 생각할 때 기술에 속하는 많은 것들을 제외할 뿐이다. 여튼 더 읽어보도록 하자. 제목이 제목이니 만큼. 그런데 기술은 과연 마술과 대립되는 것일까?
reading_20210819.txt#1217
“불행하게도 인간의 역사는 많은 상징적인 착란과 환각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문명이 밟아온 치명적인 경로는 아마도 자연의 실책들, 즉 기근과 홍수와 질병 등의 비참한 영향들 때문이 아니라, 상징 기능의 남용이 축적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금전에의 강박관념과 생산성에 대한 무시, 중앙집권화한 정치권력과 통치권의 상징들에 대한 강박관념, 대면 관계가 지배하는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상호부조 과정에 대한 무시. 종교적인 상징이 자신을 위해 유효한 삶을 부여받을 수 있는 이상적인 목표나, 사랑과 우애의 실천에 대한 무시를 유도하고 마는 종교적 상징에 대한 강박관념[……]. 상징 기능의 붕괴와 혼란, 생활을 희생한 대가로 얻은 상징 기능의 증식, 정직한 노동과 영양을 공급해주는 음식 등 인간의 일상적 필요에 대한 상징 기능의 멸시는 역사 속에서 너무나 자주 인간 존재 바로 그것에 대한 위협을 의미해왔다. 상징에의 완전한 집착, 내면세계로의 완전한 퇴각은 완전한 외형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 발전에 치명적일 수 있다.” (루이스 멈포드, ⟪예술과 기술 Art and Technics⟫, 김문환 옮김, 민음사, 1999, 66쪽.) [문장을 읽기 쉽게 고쳤음.] 적확한 비판이다. 그런데 저자의 입장은 기술과 마술을 대립시키는 전형적인 구도 속에 있다. 이러한 구도 아래 저자는 상징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인류에게 가져온 전체주의적 결과들을 비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술의 영역을 크게 제한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의 고리타분한 점이다.  가령 이런 부분.  “반복성, 표준화, 획일성은 기술의 본질적이고, 말하자면 전형적인 분야이다.”(같은 책, 97쪽.) 혹은, 산업 디자인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 다음 이렇게 말하는 부분. “만일 여러분이 기계와 사랑에 빠진다면, 여러분의 애정생활에는 어딘가 잘못이 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기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의 종교에는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하겠다.”(같은 책, 99쪽.) 매체는 형식일 뿐 아니라 내용임이 선언된 후(“미디어는 메시지다”(마샬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1964))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으며 얼마나 많은 새로운 국면들이 펼쳐졌는가를 굳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reading_20210825.txt#1218
“복제 방법들을 그 극한까지 밀어붙였던 사람들은 유일성이라는 예술의 기본적 특질을 잊어버린다. 모든 활동의 배후에 어떤 종류의 질서와 형식이 있어야 하는 한, 자극과 의미의 강도를 촉진하는 심미적 감흥들은 필연적으로 그 존속 기간이 짧아야 한다. 우리의 필요와 동화 능력에 따라 반복의 시기, 양, 기간, 빈도를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현재 우리를 압도하는 영상들과 음향들의 홍수를 제한하는 법을 배워야만, 예술에서의 복제 설비들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루이스 멈포드, ⟪예술과 기술 Art and Technics⟫, 김문환 옮김, 민음사, 1999, 129-130쪽.) 어쨌든 이 책을 다 읽었다.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나온 해가 1936. 이 책이 나온 해는 1952. 다른 선상에서 얘기하고 있지만 벤야민의 아우라론에서 더 나아간 이야기는 없는 듯하다. 그리고 맥루언의 ⟪미디어의 이해⟫가 나온 것이 1964.  멈포드는 기술과 매체에 대한 평면적인 이해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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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그로폰테는 어린 시절에 책 읽기를 싫어해서 고전 대신 기차 시간표를 읽곤 했다는 이야기로 ⟪디지털이다 Being digital⟫(1995)의 서문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나는 미디어랩의 소장이 되었고 [……] 업계와 정부가 서로 만나는 두 개의 회의를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에서 소집했다. 회의장에는 1리터짜리 유리병에 든 에비앙 생수가 제공되었다. [……] 나는 과거의 내 기차 시간표 덕분에 에비앙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다. [……] 이 무거운 생수병들은 거의 유럽의 3분의 1을 돌아 대서양을 건넌 후, 캘리포니아까지 다시 3,000마일을 더 여행한 것이다. [……] 오늘 내가 에비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 아톰과 비트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국제 무역은 전통적으로 물질, 곧 아톰을 교환하는 것이다. 에비앙 생수는 크고 무거운 불활성 물체를 많은 비용을 들여 조심스레 천천히 선적한 후 여러 날 동안 수천 마일을 거쳐 전달된다. 세관을 통과할 때에는 비트가 아니라 아톰임을 밝혀야 한다. [……] 그런데 이러한 사정이 매우 빨리 변하고 있다. 책, 잡지, 신문, 비디오 카세트처럼 사람이 직접 손으로 취급하던 정보가 플라스틱 조각에 녹음된 전자 자료 — 값싸고 직접적인 전달 체제 ― 로 변하여 광속으로 전달된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 아톰에서 비트로 변화하는 추세는 돌이킬 수도, 막을 수도 없다.” (니콜라스 네그로폰테, ⟪디지털이다⟫, 백욱인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1996, 5-6쪽.) 아톰 경제에서 비트 경제로의 변화를 손에 잡힐듯이 보여주는 생생한 서두다. 디지털이 가져온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지는 지점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네그로폰테는 유형의 아톰보다 무형의 비트가 더 큰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드라마틱하게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좋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중력의 지배를 받는 물질 세계의 운명에 대해서는 누가 좀 사이다 같은 책을 안 써주려나? 무의미하려나? 정치, 경제, 산업, 경영, 기술, 발명, 제조업, 요식업, 건설업, 일상생활 등 무수히 다양한 분야의 무수히 많은 관점이 있을 뿐인가? 또는 실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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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물질의 운명에 관해 생각해보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주제는 쓰레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가 취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버려진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내 의식은 때때로 버려진 것들을 따라 흘러가고 싶어한다. “인간은 쓰레기와 만날 때 거부와 끌림, 죄의식과 열정이 섞인 기묘한 관계를 맺는다. 사람들 대부분은 쓰레기를 성가시고 혐오스럽고 불안하고 수익성이 없다고 여긴다. 반면에 실업자나 장애인, 수감자나 퇴직자, 정신질환자나 세상과 단절된 예술가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무시당하고 버려진 쓰레기와 일종의 특별한 공모관계를 맺는다. 이들은 모두 쓰레기를 재활용하며 본디 목적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현재 이 공모관계는 선진국과 빈곤국, 그리고 신흥국을 가릴 것 없이 어디에서든 계속된다.” (카트린 드 실기, ⟪쓰레기, 문명의 그림자 : 인간이 버리고, 줍고, 묻어온 것들의 역사⟫, 이은진, 조은미 옮김, 따비, 2014.) 쓰레기를 떠올리면서 나는 이 주제가 사이다는 커녕 고구마를 백 개 먹은 듯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가령 저자가 거리의 쓰레기 수집가로 생활하면서 쓰레기 탐색자들의 생활을 문화기술지(ethnography)로 기록한 이 책을 보면 말이다. “커튼, 카뮈, 캐딜락 장식 등 ‘ㅋ’으로 시작되는 단어만 해도 끝이 없다. 이 세계의 버려진 물건들은 그 범위가 놀랄 만큼 넓으며 품종도 다양해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 또한 수년, 수세기에 이르는 문화적 범위를 자랑한다. 1800년대 책과 전통적인 장식품에서 말 그대로 어제 구매한 물건까지 없는 것이 없다. 결과적으로 한때 쓰레기로 버려진 물건들 때문에 길거리의 또 다른 세계는 물질문화의 풍요로움을 맛보게 된다. 수천 개의 쇼핑몰과 전통물품 상점, 소매점 등에서 끊임없이 배출되는 쓰레기가 바로 이 세계에 정착하면서 잃어버린 것들의 물질세계를 재구축한 것이다.” (제프 페럴,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 김영배 옮김, 시대의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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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를 사유하다"를 끝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 그 일들은 아마도 이 조각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부터 서서히 진행되었을 것이다. 끝이 어떻게 될 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시작부터 이건 모험이었고 이미 끝난 중요한 첫 부분은 전혀 굉장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후회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다이애나랩과 기술팀에게 정말 고맙다. 3강 라이브를 했던 날 배인숙씨의 레지던시 전시회를 보고 함께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엔 민경씨의 명상에 참여했다. 멋진 시간들이었는데 그 후의 날들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 없이 흘러갔다. 현기증이 난다. "환대를 사유하다"를 준비하는 일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줬다. 그게 가져다 준 변화의 크기나 방향은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여전히 수줍고 여전히 숨고 싶다. 그렇지만 어떤 문들을 두드려보고 있는 중인 것은 분명하다.
speak_20201213.txt#0594
새들이 가늘고 긴 다리로 서 있다. 물 위로 새들의 모습이 반사된다. 황혼녘이다. 하늘도 물도 수없이 많은 색의 무리로 뒤덮였다. 환대란 어떤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하는 것. 눈 앞에 펼쳐 주는 것. 귓가에 소리를 풀어놓는 것. 손끝에, 혀끝에, 코끝에 놓아주는 것. 당신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만들어주는 것. 가볍게 사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하는 장치를 발명하는 것. 당신이 혼자서 춤을 출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 그리고 당신을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부드럽게 안녕, 하고 인사하는 것.
speak_20201216.txt#0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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