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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로 양동 주민모임 일정이 자꾸만 미뤄진다. 나는 올 가을부터 양동 주민 구술 생애사 작업에 함께 하고 있다. 일정상 참석하지 못했던 지난 모임에서는 다음 차수에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을 함께 보기로 약속한 모양이다. 영화보기 모임에는 함께 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영화 관람 일정이 또 다시 미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서울역 빌딩숲 사이의 양동은 70년대부터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수십 년간 잠잠했던 양동 재개발 움직임은 근래 들어 들썩이기 시작했고 동시에 쪽방 주민들에 대한 사전퇴거행위 또한 시작됐다. 한 평 쪽방 속 저마다의 고군분투에서 나아가 함께 사는 이들과의 곁을 단단히 하고, 재개발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양동 주민 생애사 기록 모임이 꾸려졌다. 총 일곱 명의 쪽방 주민이 양동이라는 공간과 관련한 그들의 삶의 궤적을 들려주고, 이를 듣고 기록하는 이들이 모였다. 나는 이 모임에 청자로 참여하고 있다. 이 부드럽고 느린 생애사 기록 작업이 재개발 속에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지 반쯤은 물음표를 품고 시작했지만 “이런 거해서 뭐하나 싶어. 다들 자기 살길 찾아 떠나는 걸”이라 말하는 내 생애사 기록 파트너인 양동 주민의 말에는 어떻게든 힘이 되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기에 인터뷰 전에 이런 저런 대화 소재를 준비하게 된다. 양동에 관한 자료를 모으다 보니 몇십년 전 양동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사진 : 세븐 (홈리스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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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8일 상오 서울 양동(6,7통) 일대의 판자촌이 철거되었다. 이곳은 서울역앞에 위치한 창녀촌으로 6.25 동란 이후 우범지대로 당국이 골치를 앓아오던 곳인데 이날 3백여명의 경찰과 70여명의 인부가 동원, 철거하려하자 주민들이 자진철거를 주장, 말썽없이 철거가 진행됐다.

1965.10.08 경향신문 <양동판자촌 철거 주민들 스스로>

자진 철거한 양동 6통 판잣집 주민 1천 4백여명 (3백 5세대)을 시당국이 한강 백사장에 내팽겨처 놓아 주민들은 당국의 처사에 항의 농성, 끼니를 굶은채 밤을 새웠다.

8일 새벽 양동판잣집주민들은 영등포구 사당동에 천막촌을 짓고 이주시켜주겠다』는 시당국의 약속을믿고 자진철거, 47대의 트럭에 세간도구를 싣고 사당동에 도착했으나 천막은커녕 우물도 없고 나무투성이인 골짝임을 알자 이에 격분, 항의를 하자 시당국은 주민들을 용산구 동부이촌동택지조성지에다 데려다주고 그래도 사라저버렸다.

천막한채 세워 놓지않고 우물도 없는 황량한 강변에 도착한 주민들은 자동차에서 내릴것을 거부, 시청앞으로 짐을 실은채 데모하려는 것을 급거출동한 기동경찰대에 의해 저지된채 농성, 『시청으로가자』『연고지로 가자』는 구호와 마구욕설을 퍼붓는 부녀자, 점심과 저녁을 굶어 배고파 우는 어린이들로 수라장을 이룬채 밤을 새웠다

1965.10.09 조선일보 <버림받은 판자집 주민들 양동 삼백세대 일천사백여명>

판잣집 철거민에게 전해달라고 동민이 모은 동정금을 철거당일 경비차 나온 경찰의 접대비로 썼음이 밝혀저 말썽이다.

서울양동 주민들은 지난 10월 8일 철거된 판잣집 주민들에게 전해달라고 한끼굶기운동을 벌여 2만 5천 1백원의 성금을 모아 숭남동동회(동회장·이진규)에 기탁했다.

그러나 그돈은 한달반이 지난 24일 현재까지도 헐벗고 굶주리는 철거민들에게 한푼도 전해지지 않고 엉뚱하게 판잣집철거 경비차나왔던 남대문 서원들에게 접대비로 지급됐음이 밝혀져 양동주민대표 이철(이철·50)씨등 20여명은 24일 오전 동회로 몰려가 금품의 사용처를 따졌다.

또한 동회측은 이날 출동한 경찰관이 4백여명이라고 말하고있으나 경찰측은 2백명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맞서고 있다.

1965.11.25 조선일보 <철거민동정금 접대비로 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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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양동 구술생애사 작업에 함께하는 내 파트너의 냉소에는 근거가 있었다. 30년의 세월동안 양동에 적을 두고 살았지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많았던 개발과 퇴거 위기 속에 ‘공식적으로’ 쫓겨난 적조차 없었던 그의 삶을 헤아려보면 그렇다. 그렇기에 오래 전 퇴거에 대항한 양동 주민들의 한바탕 대거리와, 이주한 주민들을 위한 양동 주민들의 한끼단식 연대 소식을 발견하고 나는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과거 양동에 있었던 이 사건을 내 작업 파트너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다. 지금 퇴거 위기를 마주한 그에게 어떤 감상으로 다가갈지는 조심스럽지만 말이다.

중장년 남성 단신 가구가 대부분인 지금의 양동과는 다르게 과거 양동에는 가족 단위의 판자촌 주민이 많았다고 나의 작업 파트너는 말한다. 양동 판자촌 철거 기사는 해마다 기사가 났을 만큼 잦은 일이었다. 쫓겨난 주민의 일부는 상계동으로, 사당동으로 갔고 그 곳에서 또다시 반복되는 퇴거 위기에 맞닥뜨렸다는 이야기를 얼핏 본 기억이 난다.

판자집 지붕을 가마니로 이었다해서 가마니골로 불리던 동작구 사당동 산1과 22번지 일대가 산뜻한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정공적인 재개발지구로 꼽히고 있다. (...)가마니들일대는 68년이후 형성된 서울의 대표적 판자촌, 중구양동과 용산구이촌동에서 사당2동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배정받은 정착지건물을 팔고 이곳으로 옮겨와 (...) 5백만원가량의 자기부담금을 마련할길이 없는 상당수의 주민들이 입주권에 붙은 2백만\~3백만원의 웃돈을 챙겨 또 다른 판자촌이나 셋집을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이다.

1982.06.29 조선일보 <판자촌 비탈에 아파트 섰다>

다음 모임에 보기로 했던 <상계동 올림픽>이 너무 오래 전 이야기라 저어된다는 의견이 주민모임 텔레그램방에 올라왔다. 양동 주민과 함께 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를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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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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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즈음 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조금 걸어 나가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인다. 붉은 등으로 장식된 이 곳은 중국식 만두집. 소소한 동네 맛집이었는데 미쉐린 가이드에 오르고 tv 방영을 거친 뒤로 매번 줄을 서야해서 동네 주민으로서는 못내 아쉬워졌다.  밀려드는 손님에 정신 없을 법도 한데 항시 인품좋은 미소를 띤 사장 부부는  “오늘은 새우가 작아서 두개 넣었어요. 맛이 괜찮나요?” 라고 한명한명 묻는 친절까지 보인다. 식당 통유리 너머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손님들은 지루한 기색도 없다.

비슷한 시간 구복만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역 줄기에도 매일 줄이 늘어선다. 어림잡아 구복만두 줄의 네 배는 넘는 인원이다. 오늘의 메뉴는 닭개장과 김치, 밥. 이것이 한 대접에 몽땅 담겨 나온다. 맛집은 아니지만 항상 줄이 늘어선 이곳은 따스한 채움터, 노숙인 무료 급식소다.

작년 가을께에 채움터 앞에서 저녁식사를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던 70대 여성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아무리 기다려도 순서가 돌아오지 않자, 편의점 따뜻한 물을 빌려 컵라면이나 먹을 요량이라 내게 알렸다. 빠른 출입이 가능한 전자회원증을 만들지 못한 탓이었다. 코로나 19로 민간 종교 단체가 운영하던 급식소가 문을 닫자 서울시에서 운영중인 유일한 급식소인 채움터에 사람이 몰렸고, 서울시는 급식 시간 연장이나 공간 확장을 통해 이용자들의 식사를 보장하는 대신 전자회원증을 도입해 이용객 출입을 관리하겠다 밝혔다. 여러 이유로 이용증을 발급하지 못하는 이들은 끼니를 굶었다. 대화를 나눈 70대 여성 홈리스는 주민등록 말소 상태로, 지인의 집에서 잠을 자지만 ‘밥까지 차려먹을 염치는 없어’ 새벽같이 방을 떠나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무료급식소를 이용하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 홈리스들은 통칭 ‘집있는 아줌마’들이라 불리곤 한다. 실제로 집이 있을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집 있는 아줌마가 여길 왜 오냐, 여자들은 여기 아니어도 밥 지어먹을 수 있지 않냐. 이번만 먹게 해줄테니 다음부터 오지마라’는 급식소 관계자의 선심(?) 아래 눈칫밥을 꽤나 먹는다. “남의 집 살이 하며 그나마 옷은 깨끗이 입으니까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죠”라며 빙긋 웃어보이는 그에게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했다.

서울시는 채움터 전자회원증 도입 초창기, 거리노숙인으로만 그 이용 대상을 한정했다가 많은 이들의 항의로 ‘노숙인 복지법상 노숙인’으로 그 대상을 아주 조금 넓혔다. 쪽방 및 고시원 거주자도 대상에 포함 된 것이다. 뚜렷한 대책도 지침도 없이 시작된 전자회원증 도입 과정속에 여전히 급식소를 필요로하는 서로가 서로의 자격을 견주게 됐다. 코로나 난리통 속에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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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염부장으로 있었어예”

회사 부장으로 재직하다 IMF 시기에 노숙으로 접어드신 걸까 생각이 들던 찰나, 그는 염씨가 아닌 강씨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의아했다

“이 양반아, 그기 아이고, 염전 염부장!”

서울역과 외항선, 돼지농장과 염전을 거치며 살아온 그는 건강이 나빠진 뒤 다시서기센터의 지원으로 수급을 받으며 양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양동에는 강씨 말고도 많은 염부장이 있다.

삶을 빼곡이 채워온 이들의 노동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쌓이지 않는 일들, 그곳에선 숙식이 해결되니까, 착취당하며, 당장 돈이 급하니까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던- 이라는 수식으로 이해하던 그들의 노동에

“돼지농장에서 일할 때 마음은 편안합디다. 분만실에서 새끼도 받아보고. 그 돼지라는 동물이 그렇게 더러운 동물이 아니더라고예”

강씨가 덧붙인 한 마디가 묵직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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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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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1월 26일, 1월 28일, 2월 6일

2021년이 채 한 달 정도 지나는 동안 양동에는 세 차례의 부고 알림이 붙었다.

"장례에 가게 되면 까만 양복 같은 걸 입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거 없지 않습니까"

"뻘건 것만 아니면 되죠"

코로나로 자꾸만 모임을 미뤄야했던 양동 주민들은 이름도 얼굴도 가물하지만 함께했던 주민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모이기로 했다.

<시체해부 및 보존에 대한 법률>에 따라 불과 2012년 까지 거리 홈리스를 비롯해 가족 친지 등의 연고자가 없는 사망자는 병원에 해부용으로 '제공'됐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져온 법이다. 거리 홈리스는 "내가 죽으면 병원에 해부 실습용으로 간다"며 자신의 죽음 이후를 바라보기도 했다. 2015년, 개인이 장기기증과 시신시증 의사를 밝혀야 가능하게끔 제도가 바뀌었고 '보건위생차원'에서 무연고 사망자를 선 화장 후 공고했다. 사실상 장례보다는 사체 처리를 우선하는 절차였다.

연고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무연고 사망자'가 될 이들은 곁에 있는 이들을 모아 연대했다. 동자동 사랑방 주민협동회를 비롯한 이들은 무연고 사망자 '처리'에 항의하며 서울시의회를 점거하는 등 공영장례조례를 만들어냈다. 2018년부터 서울시 공영장례조례에따라 연고자가 없거나, 연고자가 시신인수를 포기한 경우 간소한 장례 절차를 치를 수 있게 됐다.

"떠드니까 법이 만들어지지, 안 그럼 안 만들어 집니다" 이야기를 듣던 강씨가 끄덕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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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2020년 4월 25일 영국 뉴마켓 공공도서관에 출근한 한 직원은 서고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크기와 색깔별로 보기좋게 책이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청구기호는 뒤죽박죽이 된 터였다. 코로나19 유행으로 도서관이 휴관한 기회를 틈타 청소노동자가 대대적인 청소를 벌인 것이다. 청구기호에 따라 책을 찾아본 경험이 없었을 그 청소노동자는 근무기간 내내 삐뚤빼뚤 꽂힌 책더미가 두고두고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숙원사업이었을 도서 정리를 마친 청소노동자는 꽤나 후련한 마음으로 퇴근했을 것 같다.

누군가는 책을 빌리러 가고, 누군가는 청소를 하러 가고, 누군가는 고시공부를 하러 가고,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저렴한 문화강좌를 들으러 가고, 누군가는 추위를 피할 벽과 지붕을 찾아 공공도서관으로 걸음 한다. 코로나와 함께 많은 공공장소가 문을 닫거나 이용이 제한됐다. 청소노동자의 설계로 재편된 도서관 서고의 사진을 지난 1년간 꽤 자주 떠올렸다. 서울역 대합실 의자에 쳐진 접근근지 펜스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보는 곳’이라는 도서관의 일반적인 용법과는 다른 저마다의 이유로 그곳을 찾았을 이들은 어디로 가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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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9

episode.1

“환대”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보니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라고 나온다. 다시 “대접”의 의미를 찾아보니 ‘마땅한 예로써 대함’이라고 나온다.

“환대” 법과 질서가 존재하는 사회에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환대만큼이나 사회 시스템의 환대가 중요하다. 때로는 아니 대부분의 경우 사회 시스템이 사람 간 환대를 결정 짓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얼마나 사람을 반갑게 예로써 대하고 있을까. 자신의 환경과 조건, 위치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사실일 것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보아, 아마 우리 사회 환대의 조건은 너무 많이 부족하고 모자라다.

빈곤사회연대에서 활동 하면서 사람 존재 자체만으로 환대받을 수 있는 세상은 어쩌면 내 생에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지금부터 작성하게 될 글들은 개인적 기억과 기록에 의존한 다양한 공간에서 환대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던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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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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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2

2017년 5월 “서울로 7017” 고가공원이 개장했다. 서울로 7017은 서울역 위 낡은 고가도로를 ‘철거’가 아닌 ‘재생’으로, ‘차량 길’에서 ‘사람 길’로 변모시킨 도시재생 개발사업의 일환이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 길’인 “7017 서울로”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

공원개장을 앞두고 서울시는 “제13조(행위의 제한)의 3호 ‘눕는 행위, 노숙행위 및 구걸행위 등 통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 6호 ‘심한 소음 또는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할 경우 경범죄처벌법 등으로 단속할 수 있게 하는 ‘서울로 7017 이용 관리 조례’를 발표했다.

홈리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범죄화하는 해당 조례는 서울시와 경찰의 합작품이었다. 빈곤으로 인해 노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불안정한 삶의 조건이 빚어내는 행위를 불법 행위로 보고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홈리스에 대한 단속과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폭력이었다.

서울시의회 앞 기자회견과 1인 시위 그리고 의견서 전달을 통해 3호 ‘눕는 행위, 노숙행위 및 구걸행위 등 통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삭제되었지만, 6호 ‘심한 소음 또는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는 원안 그대로 통과되어 적용되고 있다.

“서울로 7017” 고가공원은 거리홈리스에게 공간 접근에 대한 배제의 문제와 함께, 공간의 변화 속 단속과 퇴거가 강화되는 문제를 발생시켰다. 앞으로 몇 편의 글은 “서울로 7017” 고가공원 공사가 시작되고, 서울역이라는 공간에 변화가 생기며 발생했던 홈리스에 대한 차별적이고 처벌적인 조치를 마주했던 경험을 기록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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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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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3

2016년 3월 서울역 지하도에서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는 노숙 당사자 A씨를 만났다. 해당 공간은 이전 다수의 거리홈리스들이 머물고 생활하던 공간이었으나, 어느 시기부터 그럴 수 없게 된 공간이다. 어떤 증거도 없으나, “7017 고가공원” 공사 시기와 맞물려 해당 공간에 사람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진 공간에는 안전띠가 세워지고, 노숙금지 팻말이 붙었다.

A씨는 콘센트가 있는 그곳에서 전동휠체어를 충전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지하철 역무원인 B씨가 우리 쪽으로 걸어와 “여기 계시면 안 돼요, 밖으로 이동 하세요”라고 말했다. 해당 풍경이 익숙한 듯 주섬주섬 휠체어 충전기 부품을 챙기기 시작한 A씨를 대신해 “이분은 지금 휠체어를 충전하는 중이신데, 왜 나가라고 하시는 건데요?”라고 묻자, “이분은 블랙리스트라 여기 있을 수 없다”고 하며, 철도안전법 48조 노숙금지조치 행위를 이유로 들었다. “이분은 휠체어 충전 중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노숙이냐” 물으니, “노숙을 판단하는 건 이곳의 관리자인 자기네”라고 답했다. 언성이 높아지던 중 역무원이 불렀는지 경찰이 출동했고, 경찰은 “어떤 위법행위 없이 계시고 노숙하는 것도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돌아가는 역무원들을 붙잡아 소속과 직책 그리고 이름을 물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 A씨는 ‘덕분에 맘 놓고 충전할 수 있겠다.’며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철도안전법은 홈리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범죄화하는 전형적인 차별행위다. 철도안전법은 철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가운데 48조에 금지하는 행위를 열거하고 있다. 그행위는 철도차량을 파손하거나, 돌을 던지거나, 차량 운행에 위험을 발생하게 하는 행위들이다. 노숙이 이 행위들과 동일시되고 있다. 공공공간은 사인이 배타적으로 관리하는 공간이 아니다. 모든 시민이 자유롭게 이동하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다. 더불어 공적 공간에서 홈리스를 퇴거시키는 시도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추위와 비를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 안전한 공공공간에서 마저 쫓겨난다면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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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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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4

2017년 9월, 서울역 지하도에 50대 남성 A씨가 쓰러져 있었다. A씨는 간경화를 앓은지 7년이 됐는데, 지하도를 걷던 중 복통이 너무 심해져 쓰려졌고 지금 움직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니 쪽방에서 생활하며 수급을 받고 있었다. 집에 모셔다 드릴지, 119를 불러드릴지 물으니 ‘병원이 정말 너무 싫지만 가고 싶다’고 말했다. 119에 신고를 한 뒤 ‘병원이 왜 싫으냐’ 물으니, ‘지난 달 국립의료원에 입원했었는데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고 기간이 차면 퇴원 시킨다’고 답했다. 정부는 의료급여 수급자들이 과다한 병원이용, 의료쇼핑을 한다고 선동하지만 실제 의료급여 수급자들은 병원이용에서 차별을 경험한다. 잘 드는 약이나 수술은 비급여가 동반되니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구급대원 B씨와 C씨 두 명이 도착했다. 둘에게 A씨의 상황을 설명하자, 구급대원 B씨가 A씨에게 다가가 배를 여기저기 찔러봤다. A씨는 간 부위를 찌를 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C씨가 A씨에게 ‘앉아보라’고 말하자 A씨는 ‘아파서 움직일 수 없다’고 답했다. C씨는 다시 A씨에게 앓고 있는 질병과 최근 치료시기, 받았던 치료목록을 물어봤다.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는 A씨에 대답에 C씨는 ‘잘 생각해 보시라’라는 말만 반복했다. 참다 못해 ‘그런거 물을 시간에 병원 가는게 맞는거 아니냐, 아파 죽겠는데 그런거 하나하나 생각해낼 여유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묻자, C씨는 ‘서울역에 이런 사람들이 많고 꾀병 부리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쓰러져 있는 A씨 앞에서 내뱉었다. 일단 A씨가 병원에 가는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C씨가 A씨의 목덜미와 바지춤을 잡아 들어 올렸다. A씨가 지른 비명이 서울역 지하도에 울려 퍼졌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C씨를 노려보며 눈으로 욕을 했다. 그 언어를 감지했는지 C씨가 ‘왜 그런 눈으로 보시냐’ 물었다. 나는 ‘이분이 꾀병이 아니시면 어떻게 할 거냐, 119를 호출하는 모든 환자들의 꾀병 여부를 의심하고 판단하느냐, 아프다는 사람의 몸을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막 들어 올리는게 맞느냐,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냐’ 물었다. C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죄송하다’ 말했다. 하지만 그 사과 역시 A씨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A씨에게 사과하라고 말을 전하려던 찰나, B씨가 A씨의 신원조회를 끝낸 듯, ‘아 이 아저씨 지난달에도 병원 갔다 나온 아저씨네, 안 돼, 병원에서도 이제 안받아줘’라고 말했다.

‘뭐라고?’ 이성의 끈이 풀려 소리를 치려던 찰나, A씨가 ‘니들이 사람이냐, 아파 죽겠는데, 치료도 안하는 병원이나 니들이나 다 꺼져’소리를 질렀다. B씨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아저씨’라며 말을 시작하려 했고 나는 ‘뭐요? 병원 안 데려 갈 거라며? 알아서 할 테니 화 돋우지 말고 가서 일보시라’며 말을 잘랐다. 구급대원들이 자리를 떠나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A씨는 그곳에 있으면 ‘역무원들이 와서 나가라고 할 테니, 안전한 장소까지만 도와 달라’ 이야기 했고, 그렇게 했다. 집 까지 가자고 제안했지만, ‘상태가 좀 나아지면 천천히 들어 가겠다’는 답에, 재차 묻지 않고 그와 헤어졌다. A씨가 그날 방에 잘 들어갔을까, 이후에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았을까, 이후 서울역 인근에서 그를 다시는 만난 날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 나와 A씨가 만났던 공간에는 안전띠와 노숙금지 팻말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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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5

2017년 11월, 서울역 광장에서 13번 출구로 가는 길, 차도 쪽 인도에서 거리홈리스 상태에 있는 너 다섯 명의 남성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일어나 광장으로 걸어가던 중,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 걸어 온 방향을 돌아 봤다. 술 마시고 있는 무리에게 남성 A씨가 다가가 욕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 여기서 술을 처먹냐, 거지새끼들아’라는 말을 내뱉었다. 무리 중 한 명인 B씨가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웃으며 ‘알겠다, 미안하다, 곧 정리할 테니 그만 돌아가시라’고 말하며 남성에게 다가갔다. A씨는 “이런 씨x, 어디 더러운 새끼가 몸에 손을 대, 너 지금 소매치기하려고 한 거지?” 라며 멱살을 잡고 경찰에 신고하려는 듯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안되겠다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 ‘무슨 일이시냐, 쭉 지켜봤는데 소매치기 하려던거 아니다.’ 끼어들자, ‘넌 뭔데 끼어드냐’며 반말로, 욕을 시작했다.

사실 같이 욕을 하고 싶었으나 올라오는 화를 누르며 ‘당신이 엄한 사람 소매치기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냐’고 ‘어디다 대고 반말하며 욕지거리냐’ ‘경찰 불러라’ ‘법대로 해보자’ 언성을 높이니, 주변 상가에서 사람들이 나와 A씨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냥 가려던 걸 붙잡아 ‘사과하고 가라’고 말했다. A씨는 건성으로 ‘미안하다’ 했지만, 그 사과는 분명 B씨와 친구들이 아닌 나를 향한 사과였다. 상황이 마무리 된 뒤 소매치기로 의심받은 B씨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자초지정을 물으니, A씨는 그곳에서 100M 즘 떨어진 가게의 사장이고, 30분 점 즘 도로 중앙에서 술을 먹자, 소리치고 욕을 하여 차도 쪽으로 이동했는데, 다시 왔다는 내용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궁중족발 강제집행이 떠오르며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B씨에게 안주도 좀 챙겨 드시라고, 추운데 건강 조심하시라는 되도 안 될 말을 하고 헤어졌다. 광장에서 만난 동료에게 물어보니 서울역 상가 중 일부 상인들이 거리홈리스를 서울역에서 퇴출시키기 위해 만든 모임이 있었고, A씨도 그 구성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일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20년 연말, 서울시는 해당 공간에 화단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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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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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6

2020년 연말 서울시에서 ‘사람숲길’이라는 이름의 자전거길과 인도를 확대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도로의 차선을 줄여 자전거길과 인도가 만들어질 그 길은 광화문에서 시작해 시청을 거쳐 남대문 그리고 서울역으로 이어졌다. 더위가 가실 즈음 서울역 곳곳에 도로와 마주한 인도 위 플라스틱 바리게이트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남대문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길엔 서울역 3번과 4번 그리고 5번 출구가 도로에 근접한 인도에 있다. 4번 5번 출구는 저녁 시간대 유동인구가 적어 조용하게 쉬기 좋은 몇 안되는 공간 중 하나였다. 공사는 어떤 양해나 사전 안내 없이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또 ‘사람’을 표방하며 만들어지는 공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공사가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바리게이트가 치워진 그곳에는 서울시의 계획대로 인도와 자전거도로가 들어섰다. 이전에 그 공간을 생활반경으로 삼았던 이들이 다시 그곳에서 지낼 수 있을지.. 그렇게 또 하나의 누군가에게 소중했던 공간이 너무 쉽게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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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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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7

거리에서 생활하더라도 시끄러운 공간이 싫어 사람이 없는 서울역 11번 출구 인근에 홀로 자리를 잡고 생활하던 이가 있었다. 많은 박스를 겹치고 덧대 만든 박스집은 그가 그 공간에서 지낸 세월을 보여주었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역에 XRT가 들어선 다는 소식이 들렸고, 11번 출구 앞에도 서울역 XRT공사가 시작됐다. 공사가 시작된 후 그는 그곳에서 쫓겨나야 했다. 과거, 말로 들어선 알 수 없는 서울역 철도부지 어딘가에서 움집을 짓고 살다가 그곳이 개발되어 쫓겨나 11번 출구 앞에 새 자리를 만들었다는 그는 다시 개발에 의해 쫓겨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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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

episode.8

서울로7017 고가공원, 민자역사, 사람 숲길은 각각의 사업이 아니라 강북의 코엑스로 불리는 ‘서울역 북부 역세권 개발 사업’ 의 일환이다. 소송에 휘말리며 기간이 지연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다.

2011년 강제퇴거 그리고 서울역과 주변의 개발 계획이 하나하나 실현될 때 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축출했다. 축출된 사람들을 연세빌딩 중앙지하도로 몰았다. 중앙지하도는 다른 통보에 비해 사람이 덜 지나다니고 넓어 많은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곳이다. 7017 고가공원 개발이 한창이던 2016년 서울시는 중앙지하도 위생이 좋지 않아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고 있다며 화장실을 만드는 등의 조치를 취하라는 협조 공문요청을 서울메트로와 남대문경찰서 등 각종 공공기관으로 발송했다. 중앙지하도는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다닐 시간까지 셔터가 내려지며 지하철역과 분리된다. 그 시간대에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 하지만 해당 조치는 환경개선이 아니라 공공기관의 괴롭힘으로 나타났다. 경찰들은 중앙지하도 불심검문을 강화했고 노숙인 종합지원센터는 지하도에 천막을 펼쳐 상담을 한답시고 시설입소를 강요했다. 그리고 서울메트로는 중앙지하도에 이전에 없던 시간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중앙지하도는 저녁시간대부터 입장이 가능하며 새벽 4시30분 즘 퇴거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매년 겨울철 한랭질환 방지를 위해 설치하던 유리문을 설치하지 않기 시작했다. 겨울철 중앙지하도에는 양 옆으로 네 개의 지하철역 출구와 개찰구로 향하는 통로까지 5개의 통로로 차고 거센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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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episode.9

2016년 여름,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극심한 폭염이 지속됐고, 한국 역시 5월부터 더위가 시작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심이었던 7월,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남대문 쪽방에 살았던 A씨는 더위로 인해 일이 없어지자 일용직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방세를 연체한 뒤 쫓겨났다. 당분간은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인력소에 나가도 일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조건부수급에 대해 안내하고 함께 신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수급신청에 앞서 다시 주소지를 만들기 위해 그이가 거주하던 곳의 쪽방상담소에 찾아가 주거지원을 신청하기로 했다. 다음날 만난 A씨는 먼저 상담소에 다녀왔는데 자신은 지원이 안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지원받을 수 없는 이유가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함께 상담소를 찾아가 물었다. 상담소에서 일한지 꽤나 오래된 담당자는 A씨와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기에 불편하다는 공기를 계속 내뿜었고, 그걸 알아차린 A씨는 담배피고 있겠다며 나갔다. 분노를 참고 왜 안되냐는 내 질문에 담당자는 ‘저분은 일을 하시던 분이고, 여름철에 밖에서 자는게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아서’라고 답했다. 홈리스복지 전달체계 담당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밖에서 자는게 안 위험하면 당신도 퇴근하고 집에 가는거 귀찮을 텐데 밖에서 자지 왜 집에 들어가서 자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서 한 그이의 말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무너뜨렸다. ‘솔직히 말해서 저 아저씨가 일을 못 나가는 건지 안 나가는건지 어떻게 알아요’

그곳에서 한바탕하고 나와 다른 곳에서 주거지원을 신청했다. 복지제도에서 정하고 있는 대상과 선정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 잣대로 제도를 운영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가 있기 때문에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회에 해악적 존재들을 종종 아니 자주 만난다. 시스템의 문제라고, 분노와 저주를 그들에게 향하지 않아야 한다고 수 없이 되내이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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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episode.10

이번 글부터는 지난 글에 이어 복지제도를, 그중에서도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신청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환대받지 못한 경험을 작성할 예정이다.

2016년 서울시 OO구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A씨는 수급자격을 유지하던 중 탈락 통보를 받았다. 다름 아닌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이었다. 이혼한 전 배우자에게 양육권을 넘긴 자녀의 소득이 기준을 초과했다는 이유였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가족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시 ‘가족관계 해체 사유서’를 제출하여 지방생활보장위원회라는 기구의 심의를 받을 수 있으며, 가족관계 해체로 인정될 시 부양의무자와 관계없이 수급권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이지만 부양의무자기준이 폐지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인 것은 이러한 내용이 당사자에게 제대로 안내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유서는 작성하는 것 만으로 고역이다. 내가 왜 가족과 떨어져 살고, 연락하지 않는지, 어떤 이유로 관계가 해체되었는지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며 작성해야 할 뿐 아니라, 해당 사유서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안건으로 전달되어 알려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A씨와 함께 가족관계 해체 사유서를 작성해 동사무소에 이의신청서와 함께 제출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뒤 이의신청이 기각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동사무소에 전화해보니 약 4년 전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유로 해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가족관계해체는 일 년에 몇 차례 연락이나 방문을 하더라도 실제 경제적 정서적 부양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명백한 행정의 지침 오해석이었다.

구청을 찾아가 따졌다. 더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해당 내용을 지방생활보장위원회에 올리지도 않은 채 구청 자체적으로 판단했다는 사실이었다. 구청에 해당 내용을 지방생활보장위원회에서 심의해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한 뒤 나왔다.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 수급이 재개됐다.

수급이 재개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기다리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의신청 기간동안은 급여가 보장되지 않기에, A씨는 탈락통보를 받고 혼자 고민한 약 2개월에 더해 이의를 제기한 뒤 수급권 재개가 결정될 약 6개월, 합이 8개월 동안 소득 없이 생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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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episode.11

2017년 초, 시각장애가 있는 A씨는 1년 전 부양의무자기준에 의해 수급에서 탈락한 뒤 계약직으로 노동했다. 1년의 기간이 지난 뒤 계약은 연장되지 않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A씨의 부양의무자는 부모님이었는데 모두 노인이었고 연금소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소득은 부양의무자기준을 초과하지 않았지만 서울에 자가로 거주하고 있는 집이 기준을 초과한 이유였다. 가족관계 해체가 아니더라도 갖고 있는 집 외의 재산이 없고, 소득도 적으니 예외로 인정이 가능하기에 재신청을 위해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A씨와 함께 동사무소에 들어서자마자 동사무소 직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가족 때문에 안되는거 알면서 왜 또 오셨어요?’ 당혹스러웠다. 다른 용무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런 경험을 일상에서 해 오셨구나.’ 라는 분노와 함께 ‘지금 어디서 큰 소리냐’ ‘이분 수급신청 하러 온 것 맞고 특례 사유로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인데 당신들이 제대로 안내하지 않아서 못 받고 있는 것 아니냐’ ‘이거 명백한 행정 오류고 권리 침해다.’ ‘지금 우리는 행정소송 준비하고 있다.’ 고 맞받아 소리쳤다.

몇 초의 침묵이 지나고 담당 공무원은 ‘죄송하다.’며 나와 A씨를 자리로 안내했고,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신청을 마치고 나와 A씨는 ‘우리가 어려울 때 동사무소에 갈 수 밖에 없는데, 아까처럼 문전박대 하면 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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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5

episode.12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는 문재인대통령의 공약이었다. 2017년 8월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장관은 2020년 제2차 기초생활보장종합계획에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부양의무자기준 완전폐지 계획을 담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2020년 8월 발표된 2차 종합계획에는 생계급여에서 완화, 의료급여에선 아무런 계획도 수립되지 않았다.

2차 종합계획이 발표되는 시기, 80대 A씨와 동사무소를 방문했다. A씨는 수선노동을 하는 노점상이다. 30년 동안 노점 장사하던 앞이 개발되더니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다. 공공기관은 노점상들에게 무대책 퇴거를 통보하고 전기를 끊었다. 전기가 들어오면 수선을 할 수 없어 수입이 뚝 끊겼다. 하지만 30년 노동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전기가 끊긴 2018년 연말 A씨는 수급자가 되었다. 하지만 2달 뒤 생계급여와 의료급여에서 탈락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유는 부양의무자기준. 이전까지는 아들이 이혼한 전 남편을 부양하며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으나, 전 남편이 사망하며 아들이 자신을 부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알지만 연락을 하지 않는다. 경제적 부양을 받지 못하며 받고 싶지도 않았다.

가족관계해체 사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방문했다. 담당공무원은 ‘부양비 징수여부에 동의하지 않으면 심의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부양비징수 여부는 가능성에 대한 안내를 하는 것이지 동의하지 않으면 심의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은 법과 시행령 그리고 지침 어디에도 없다’고 이야기하니 신청 서류를 받았다. 제2차 종합계획이 발표 된 뒤 A씨에 결과를 알리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심의가 끝났을 시점이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셨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참담했고 분노스러웠다. 서류를 지출한 뒤 구청직원이 A씨에게 전화해 ‘수급자로 결정돼도 아들에게 비용을 징수 할 수 있다’고 ‘그래도 하실 거냐’며 포기를 종용해, A씨는 심의 받기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협박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지침에서 가능하게 하고 있는 특례들을 담당공무원 멋대로 판단하고 운영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회보장제도의 변화에서 가장 느리고, 변화를 거스르며 가로막는데 가장 앞 선 주체가 공공기관,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이라는 점은 분노스러우면서도 슬픈 현실이다. A씨에게 2차 종합계획의 결과를 알리며 내년에는 그래도 생계급여에서 조금 완화되니 신청을 해보라고, 정보를 전달하고, 언제 한 번 놀러가겠다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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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episode.13

episode.12의 주인공인 A씨는 어린 시절부터 평화시장에서 미싱 노동을 하다, 기술이 발전되고 청계천이 번화하며 시장을 떠났다. 현재의 가건물에서 노점상을 시작한지도 30년이 지났다. 그러던 몇 년 사이, 현재 있는 공간의 주변도 변하기 시작했다. 길 건너 낮은 건물들이 철거되더니 높다란 아이파크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리고 입주 시작을 앞두고 가건물에 공급되던 전기가 중단됐다. 가건물이 있는 자리는 공영부지로 A씨를 포함한 10여명의 노점상인들은 철도청과 구청에 사용료를 연 단위로 지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구청과 철도공사는 노점상인들에게 무작정 나가라고만 이야기 하는 한 편, 수입이 중단된 상인들에게 점용료를 지불하라는, 수신인 란에 “무단 점유자 귀하”라고 적힌, 독촉 고지서를 계속 발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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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episode.14

도시 공간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노점상인들이 밀려나고 사라지고 있다. 과거 대표적 상거래 노동이었던 노점상은 화려해지는 도시 속 미관을 해치는 존재로 의도적으로 재해석되며 지자체가 구입한 용역 폭력에 의해 거리에서 축출된다. 해당 거리를 누구보다 오래 지키며 생활권을 형성해 온 사람들이지만, 그 공간의 변화에 어떤 의견도 제출할 수 없다. 지나는 지하철역 주변 등에 어떤 이유에서 설치되었는지 모를 대형 화단이 자리하고 있다면, 그 곳은 과거 노점상인들이 일상을 이어나가던 공간이었다고 예상해도 충분하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경제위기를 마주하고 있는 시기에도 노점 단속과 퇴거는 계속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한창이던 9월 초 새벽시간, 마포구청은 마포역 한국전력공사 담벼락에서 장사하던 노점상인들의 포장마차를 훔쳐갔다. 당시 노점상인들은 방역에 협조하며 장사를 중단한 상태였다. 경제위기가 불평등에 안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큰 고통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에서 일자리 제공과 고용유지의 언급을 계속하는 상황에서, 공공기관이 코로나를 기회로 가난한 이들의 생계수단을 강탈해간 것이다. 이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노점상인들은 마포구청을 상대로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

* 참고 관련기사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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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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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5

2017년 폭염이 시작되던 6월, 강북구 삼양사거리에서 노점을 하던 60대 여성이 강북구청이 구입한 용역깡패들의 노점단속 과정에서 쓰러졌다. 용역깡패들은 쓰러진 노점상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피해 노점상은 쓰러진지 40분 만에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뇌사상태에 있다가 사망했다. 사인은 쇼크로 인한 뇌출혈. 노점상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명백하게 강북구청에 있었다. 하지만 구청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노점상들끼리 다툼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며 허위날조를 시도했다. 여러 단체들이 장례투쟁에 결합하자 장례비를 제시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18일간 다양한 방식의 투쟁을 진행한 결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 등의 요구를 구청과 합의하며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 올 수는 없다. 구청의 사과나 책임자가 처벌받는 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국가에 의한 폭력과 살인은 정권을 막론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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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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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6

화려해지는 도시는 위 글들에서 언급한 홈리스와 노점상 뿐 아니라 원주민들을 밀어낸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은, 특히나 서울과 같은 대도시나 신도시의 경우, 높은 확률로 누군가 쫓겨난 자리일지 모른다. 원주민들에 대한 대책 없이 이윤만을 위해 달리는 개발사업, 그에 맞서 싸우는 철거민들이 있다. 철거민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2009년 용산참사가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용산참사 12주기가 되었다. 검경 모두에서 당시 경찰특공대를 투입한 무리한 진입으로부터 참사가 발생했다는 사실, 국정원을 동원한 댓글조작과 같은 국가권력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음이 드러났지만, 책임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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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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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7

용산참사로부터 12년, 여전히 쫓겨나는 사람들, 그에 맞서 싸우는 철거민들이 있다. 국가를 넘어선 세계적 위기 상황이라는 코로나 시대에도 강제퇴거는 계속된다. 집에 머물 것을 방역의 기본으로 내세우며 집을 부수고 쫓아내는 폭력이 법이라는 이름으로 강행되는 사회에, 우리는 어떤 안전과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미아 3구역 철거민들은 감염확산 초기인 2020년 3월과 5월, 200여 명의 용역을 동원한 강제집행에 의해 거리로 내몰렸다. 대책없이 쫓겨난 철거민들의 지인 집, 여인숙, 고시원 등에 거주하며 임대주택을 요구, 강북구청과 철거현장에서 계속 싸우고 있다.

* 참고 관련기사 :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51

철거 폭력의 양상과 강도는 약해지지 않았다. 최근 철거현장에는 포클레인, 살수차 등의 중장비가 등장한다. 철거민들은 철거현장의 폭력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상황이 심각단계였던 2020년 3월, 정부는 방역지침으로 ‘사회적 거두기’를 발표하며 ‘집합금지’ 조치를 취했다. 철거민들의 집회신고가 반려됐다. 하지만 전국의 철거현장에는 수백 명의 용역 틈 없이 몰려 들었다. 방배 5구역에도 5월 11일 강제집행이 있었다. 300여명의 용역과 중장비가 동원됐다. 용역들은 철거민들에게 돌을 던지고 물리적 폭력을 가했다. 용역에게 맞은 철거민이 쓰러진 채 미동이 없었지만 용역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구급차가 출동하는 등 응급상황이 발생했지만 경찰 공권력은 아래서 구경만 하다가, 철거민들을 연행해갔다. 당일 집행이 종료되고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경찰서 앞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나가던 경찰이 ‘우리가 때렸냐’며 역정을 냈다. 대책없이 삶의 터전을 부수는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철거민들은 방임자이자 동조자인 경찰에게 수사를 받고 재판을 받고 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죄’ 집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법과 경찰의 허용아래 용역 깡패들에게 폭행당한 철거민들에게 적용된 죄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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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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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8

쪽방지역의 대부분이 개발구역으로 묶여있다. 쪽방지역 개발은 쪽방주민 축출의 역사였다.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이주비 등 최소한의 보상조차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2년과 2003년 영등포구 내 위치한 쪽방 480여개가 소멸되었다. 2005년에는 남대문에 위치한 400여개가 철거되었고, 2008년 용산구 소재 쪽방과 고시원 80여개가 사라졌다. 쫓겨난 이들 대부분은 인근의 쪽방이나 거리로 유입되었다.

2015년에는 남대문에 있는 100여명이 퇴거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주민들 대다수는 퇴거통보 벽보를 확인하거나 집주인에게 구두로 일방적 퇴거 통보를 받았다. 왜 쫓겨나야 하는지,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같은 해 동자동에서는 쪽방 건물을 구입한 새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통해 수익을 올리려는 목적으로 40명의 주민들을 쫓아내려다가 주민조직, 연대단체들의 대응에 철회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 쪽방개발을 영등포와 대전 그리고 부산에서 공공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너무 느리다. 현재에도 남대문5가 양동 쪽방지역에서 퇴거조치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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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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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19

한 평남짓의 쪽방에서 그리고 거리와 공공장소에서 반복되는 박대는 시설입소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는 가난한 이들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정책적으로 사회에서 분리 시켜 왔다. 그리고 이것을 복지라 부른다. 장애인 복지를 포함한 한국의 복지제도는 시설중심 복지를 유지하고 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일과를 수행한 뒤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일상이 통제되어 관리되고 감시받는 삶을 우리 사회가 허용하고, 그러한 삶을 만들어냄을 통해서 사회복지 예산으로 금고를 불리는 거대 시설자본을 만들어냈다. 권리의 목록과 언어가 만들어지고 확장되며 시설이 아니라 주거중심 정책으로의 변화가 세계적 추세이지만, 한국은 미온적이다. 여전히 3만 여명의 장애인들이 시설에 수용되어 있다. 집단거주시설은 사회와 격리된 섬이다. 코로나 시기 위생시설 등이 갖춰진 독립 공간을 확보하여 최대한 머물거 사람과의 거리를 두라면서도, 여러 사람의 삶이 억지로 우겨넣어져 있는 시설은 그래도 뒀다. 아니 “코호트 격리”라는 격리의 격리 조치를 통해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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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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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20

지난 2021년 1월 22일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 20년이었다. 진보적 장애인 운동단체들이 오이도역에서 서울역으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다시 버스로 광화문으로 이동했다.

2001년 1월 22일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부부가 리프트에서 추락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날을 기점으로 모든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도입, 특별교통수단 도입을 요구하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시작됐다.

이동권 투쟁 20년의 성과로 교통약자 이동편의 증진법이 만들어지는 등, 저상버스와 특별교통수단이 도입되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 속도가 너무 느리고 부족하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참사로부터 16년이 지난 2017년 신길역 리프트에서 같은 참사가 발생했다.

저상버스와 특별교통 수단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20여 명이 서울역에서 광화문으로 이동하기 위해 수 대의 버스를 보내고 저상버스에 모두 탑승하는데 1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특별교통수단을 기다리는데도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예약을 해야하고 몇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지하철역의 경우 서울을 기준으로 1동선 엘리베이터 100% 설치가 여전히 달성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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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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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의 조건은 무엇일까? 내가 일상적으로 마주치고 집중하는 문제는 환대보다 퇴거, 금지, 축출, 독점, 배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고 환대를 이야기하긴 어렵다. 홈리스를 쫓아낸 자리에 화단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친다며 노점상을 철거한 온화하고 순종적인 거리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안전하다고 거짓말 하기 때문이다.

2018년 12월 2일, 마포구 아현동에 살던 박준경씨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세번의 강제집행으로 모두 뺏기고 쫓겨나 이 가방 하나가 전부'였던 그는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목숨을 끊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처럼 오늘도 날씨가 무척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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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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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공공서비스가 가장 먼저 문을 걸어 잠근 것은 아주 나쁜 관행이었다. 공공서비스가 없으면 스러지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관이 아니면 하루 종일 갈 곳이 없는 사람, 노인정이 아니면 알량한 에어컨 바람이나 온기마저 마음편히 얻기 어려운 사람들을 내모내는 것이 '방역'이라는 점은 의아하다. 코로나19때문에 지난 여름 무더위 쉼터는 문을 닫았다. 이곳을 이용하던 이들에게 쉼터로부터의 소개는 안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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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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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예방을 위한 이 조치는 은밀한 퇴거다. 코로나19 이후 이용이 뜸해진 서울역 도심공항에 노숙인들이 모이자 의자를 폐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자는 아예 사라졌다.

이 의자에 매일 앉아 있던 한 홈리스는 종일 서 있어 다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방역 조치는 누군가에게 강제 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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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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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가 전주집에서 화보를 찍었대도 청계천-을지로 개발은 멈추지 않는다.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흐르는 거대한 산업단지는 한 구역, 한 구역 개발을 위해 구획된 점선에 따라 사라지는 중이다. 개발은 핏줄같이 흐르는 골목을 싹 지운다. 이제 큰 골목 작을 골목,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 자리 같은 것은 없다. 골목의 이야기가 사라진 밋밋한 땅은 비싼 집을 살수 있는 사람들 각자의 지분으로만 남을 것이다.

청계천3가에 들어서는 세운 힐스테이트는 청계천 일대 재개발의 포문을 연다. 20평 남짓한 힐스테이트 오피스텔의 분양가는 8억에서 9억. 분양상담을 진행하던 모델하우스 직원은 10%의 계약금만 내면 40%의 대출이 가능하고, 2022년 50%의 중도금을 낼 때쯤에는 전세 가격이 분양가에 맞먹을 것이니 세입자를 들이면 된다고 설명했다. 아직 이 주변이 '지저분' 하지만 곧 정리될 것이라는 그의 말을 지지하듯 청약경쟁률 53.1:1이라는 플랑카드가 펄럭이고 있다.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마다 누군가는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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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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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있는 이 아파트는 오밀조밀한 골목길을 지우고 생겨났다. 입주민의 안전과 시설물 보호, 코로나19 예방과 '외부인' 출입을 금하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과 미지의 존재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감각은 이따금 부끄러움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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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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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패스트푸드점으로 노숙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직원은 <큐알코드>를 요청했다. 핸드폰이 없으면 출입할 수 없다고 말하는 직원 앞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전에도 여기서 밥을 먹은적이 있다는 혼잣말로 응수했다. 나도 한 때는 여기에 속한 적이 있는데 왜 오늘은 안 되냐는 그의 말은 별 힘을 얻지 못했다. 둘의 작은 실랑이에 집중된 시선때문인지, 그는 혼잣말을 웅얼거리며 매장을 빠져나갔다. 예의바른 직원은 그의 뒤통수에 저희도 어쩔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라고 외쳤다.

이따금 퇴거는 무척 고요하게 일어난다. 시커먼 용역 폭력과 쫓겨나는 사람의 날카로운 항의가 없어도 강제퇴거는 일어난다. 사진 속 기둥도 그렇다. 기둥에 있는 전기콘센트를 이용하려는 노숙인들이 이 기둥에 기대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못마땅한 누군가는 깔끔하고 조용하게 의자를 해체하고 콘센트를 막는 것으로 대응했다.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을 조용히 단념시키는 것. 드잡이가 필요없는 퇴거야 말로 이 시대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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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3

한국에 사는 사람 중 절반 조금 넘는 가족들은 1채 이상의 집을 소유했고, 절반이 조금 안되는 가족은 집이 없다.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 상위 10%는 2019년 한해동안 평균 집값이 1억 2천 6백만원올랐다고 한다. 한달에 천만원도 넘는 돈을 평균적으로 벌어들인 것이다.

한국의 집문제는 거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자신의 모든 노동소득을 갈아넣어 참여하는 전투다. 이들 중에는 승자와 패자가 나뉘지만 승리의 공식은 명확하다. 집값은 오른다, 서울 그리고 강남의 집값은 특히 오른다, 비싼 집일수록 더 많이 오른다.

지난 10월 빈곤사회연대는 반빈곤영화제를 개최했다. 영화제의 제목 <누가 집값을 올리는가>와 동명을 가진 영화는 세계 다양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집문제를 고발한다. 많은 나라의 상황 중에도 우리는 너무 멀리왔다. 모두의 노동을 쥐어짜 임대료를 내고, 오르는 집값의 이익은 소유자가 독점하지만 임대소득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다.

부동산 문제를 공유하는 카페에 가보면 집값상승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있다. 이들은 여전히 서울의 집값이 너무 싸다고 말한다. 홍콩이나 샌프란시스코처럼 집값이 더 오를 수 있다고, 올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지옥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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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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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인근 지하도 컨테이너박스로 마련된 잠자리. 2011년 역사 내 야간시간 취침을 금지하고, 노숙인을 강제퇴거 시키기 시작한 서울역을 대신해 서울시는 커다란 컨테이너를 거리에 설치했다. 컨테이너가 생긴다고 해서 퇴거의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니다. 서울역은 여전히 경비용역을 상주시키며 서울역 내 노숙인을 눈과 발로 쫓고, 의자에 기대어 졸기라도 할라치면 '이용 고객의 공간'이니 나가라고 종용한다.

가장 오래 머무르는 공간에서 환대는 커녕 가시방석같은 눈초리만 받는 것은 마음을 갉아먹는 일이다. 가난이란 이렇게 무수한 거절과 무응대에 빠지는 일이고, 낙담과 단념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일이다.

응급대피소 잠자리가 종료되던 날 한 노숙인은 동료들인지 자신인지 모를 이들에게 응원을 남겼다. 시작하는 날 다시 만나, 우리 그때까지 꼭 살아남기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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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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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지역 코로나19 감염 확산이 시작됐다. 지난 한해동안 홈리스활동가들은 홈리스에게 주거지원이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요구했지만, 한 시사라디오 진행자는 '그건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저 감염이 없기를 바라기만 했던 날들이 지나 바이러스는 퍼져나가기 시작했는데 대책은 검사 강화뿐이다. 기존 질서를 전복할 상상력이 멈춘 자리, 그곳에서 사람들이 소멸하고 있다.

(사진, AP Photo/Ben Margot,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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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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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인근 도로에는 감염병 예방을 위해 노점상을 금지한다는 플랑카드가 걸려있었다. 노점상은 금지하지만 시장은 방역하고, 건물주님께는 감사한 도시. 이 위계야 말로 우리 사회를 좀먹는 바이러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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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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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사회연대 사무실이 위치한 아랫마을은 오래된 단독주택이다. 아랫마을에는 홈리스행동,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반빈곤운동 단체들이 모여 있다. 우리는 함께 사무공간을 꾸리고 밥을 먹는다. 홈리스행동이 운영하는 홈리스야학이 진행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난한 단체들이 모여 공간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보증금도 월세도 풍족할수 없지만, 서울역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아 걸어서도 올 수 있기를 바랐다. 야학 공간과 회의실을 겸할 공간과 대량의 식사를 준비하기 용이한 적절한 사이즈의 부엌도 필요하다.

7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여름에는 밖보다 덥고 겨울에는 밖만큼 춥기가 흔하다. 좁은 하수도는 막히기 일쑤고 연중 9개월은 모기가 들끓는다. 이렇게 낡은 건물을 건물주 도움없이 수리하며 살아도 월세 150만원을 꼬박꼬박 이고지고 살아야 한다. 좁고 가파른 계단이 여럿 있어 접근권에 제약이 많다는 점은 늘 마음의 빚이다.

그래도 이곳은 내 마음의 안식처. 언제나 그리울 곳. 가난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곳, 작은 힘이나마 모아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한 우리의 전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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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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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잘 하고 있는걸까 의심이 차오르고 모든 일에 회의가 넘치는 날.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비웃음을 살 것이라 생각하며 울적해지는 날.

그런 기분에 휩싸인 나를 영수증 봉투가 위로해주었다. 누르면 여러 색깔이 나오는 볼펜 중 한 색깔로 빈-곤-사-회-연-대-를 눌러 적고, 딸깍 다른 색깔을 눌러 하-트-를 그렸을 사람의 마음이 뭉개뭉개 날아왔다.

내 마음이 조금 못생겼어도 그래, 나는 친절할 수 있어 하고 용기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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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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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가명)님을 처음 만난 곳은 서울역 광장이었다. 그녀는 단촐한 짐으로 노숙을 시작해 차츰 괜찮은 끌차와 비닐덮개를 장만했다. 박스와 담요가 덧대어진 작은 끌차에 몸을 우겨넣고 그렇게 겨울을 났다.

여러번 복지제도에서 탈락했던 남순님은 꼬박 일년 반을 거리에서 보낸 끝에서야 복지신청을 다시 하겠노라 용기를 냈다. 함께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를 여러 날, 봄에 시작한 신청은 여름이 지나 겨울이 될 때쯤 안정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던 남순님은 돈이 없던 시절 아랫마을에서 먹은 밥값을 갚고 싶다며 쌈짓돈을 꺼냈다.

코로나19로 증가한 마스크 쓰레기는 모두 어디로 갈까? 남순님의 귀에 걸려있던 마스크는 한번에 버려지지 않고 쌈지가 되었다. 이토록 창조적인 쓸모를 찾는 그를 정부는 "근로능력 없음"이라고 판정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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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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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봄, 나무로 된 생선상자를 쪼개는 노량진 상인에게 무엇에 쓰려 하냐고 물었다. 그는 겨울에 투쟁하려면 추우니 드럼통에 불을 피우겠다고 답했다. 겨울이 올 때까지 투쟁하면 쓰나, 얼른 끝내서 그 나무는 안 쓰는 것으로 하자고 농담을 던졌다.

그리고도 겨울을 세 번 건넜다. 구시장은 무너졌고 모두 다 쫓겨났다.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얻은 상인들은 그래도 수협이 잘못했다는 뚝심에 기대어 위태로운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다.

얼마 전 수협이 끊어낸 육교가 다시 옛 시장터와 연결됐다. 죽은 줄만 알았던 구시장 고양이들이 살아 남아 농성장으로 밥을 얻으러 온다고 한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햇빛이 들이친다. 살기 위해 싸우는 일이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다시 동료의 얼굴을 보고, 아직도 살아 있어 용하구나 칭찬할 고양이를 쓰다듬는 일이 우리의 일상에 베어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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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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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달아 며칠씩 술 마시는 날들을 아저씨들은 아리랑고개를 넘는다고 표현했다. 아리랑고개로 가버리고, 아리랑고개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아리랑고개 넘느라 며칠씩 연락이 안되는 사람들이 속상했다.

십년 전 어느 날 왜 다들 이렇게 아리랑고개를 가냐는 내 푸념에 한 선배는 다들 착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착해서 그래. 착해서 남탓도 못하고 술만 먹는거야. 잊지도 못하고 술만 먹는거야. 남들은 못 괴롭히고 자기만 괴롭히는거야. 착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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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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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강제철거에 대비해 남대문 시장 바닥에서 밤샘 농성을 하던 어느 날, 옆자리 노점상이 계란 하나를 까주었다. 집회를 잠시 쉬는 동안 수육에 홍어, 탁주까지 싸온 베테랑 할머니 노점상 틈바구니에서 사는 얘기를 가만히 들었다.

노점상 단체는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속한 조직이었다. 학교를 오래 다니지도 않았고 흔한 계모임 하나 낄 틈없이 빈한한 삶을 보냈다. 노점상이 되어 하루 열 다섯시간을 일하고 천대받고 쫓겨다니지만 그래도 기쁨이 생겼다. 처음으로 동료가 생겼다. 난생 처음 버스를 빌려타고 꽃놀이며 단풍놀이를 가보았다. 길바닥에서 밤샘하는 농성이지만 이 또한 돌아보면 추억이 됐다.

기쁨은 그렇게 찾아내는 일. 화려해지는 도시에서 쉽게 쫓겨나고 밀려나는 자리 하나 하나에는 노련한 기쁨의 장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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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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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그의 삶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방랑벽, 혹은 정신병이라고 말했다. 그가 재개발로 집에서 쫓겨난 뒤 하늘을 지붕삼는 것 외에 별 도리도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홈리스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그는 철거민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 인왕산자락에서도, 봉천동 자락에서도 그저 쫓겨나기만 했는데 싸움을 시작하고 보니 새로운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청계천-을지로 개발에 쫓겨나는 상인들이 문화제를 열자 청계천에서 노점하던 노점상이 함께 했다. 그는 청계천 개발 후 이면도로로 밀리고 밀려 삶과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다. 거짓말에 속지말고 서울시도 믿지말고 동지들 꼭 끝까지 싸워 승리하시라 응원했다.

방배동의 한 철거민은 허세욱 열사와 노동조합 활동을 같이 한적이 있다고 말했다. 허세욱 열사가 입원해있던 한강 성심병원 촛불문화제에 자주 참여했었노라 말했더니 그는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때 자리를 채워준 낯 모르는 사람들이 늘 고마웠는데, 인사를 하지 못해 계속 마음을 쓰고 살았노라 말했다.

갈팡질팡한 삶을 똑바로 걸어가려면 서로가 필요하다. 남의 일도 내 일같은 이유는 우리가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빠져나갈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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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다고 똑같이 구입할 수 있는건 아니다. 비교적 시설이 깔끔한 고시원들은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을 꺼린다. 하루 7천원, 8천원 하는 후줄근한 여인숙도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 머물라치면 '하룻밤 재워주고 장사치를 일 있냐'며 독하게 쏘아부친다. 일주일쯤 머물겠다 협상하면 은근히 하루를 1만원으로 올려 7만원을 요구하지만 그래도 갈 곳이 없어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한두평 쪽방이 한달 25만원 30만원까지 오르는 데는 다양한 공모자가 있다. 머슴과 일용직으로, 염전과 양계장에서 빡빡 굴려먹던 이들의 몸이 소모되었을 때 이들이 향할 곳은 요양병원이나 기도원, 허름한 쪽방과 여인숙같은 선택지뿐이다. 방주인들은 여기 아니면 갈데가 있냐는 심산이니 수급비가 오를 때마다 차곡차곡 방값도 올린다. 똑바로 돌아가는 세탁기가 있으면 감지덕지고, 공용 부엌이라도 있으면 이보다 좋기는 어렵다고 봐야한다.

특히 아래 위로 창이 두 개 씩이나 달린 방을 얻기란 정말 어렵다. 벽이 너무 얇아 옆방 소리가 한방처럼 들리지만 그래도 불 안 켜고도 밝은 방에 새 장판, 새 벽지라니. 여러번 거절을 겪은 뒤 이 방을 보고는 너무 좋다 그쵸 들뜬 목소리로 수선을 떨었다. 말 해놓고도 깜짝 놀라 내가 싫었다. 26만원에 관리비 2만원. 관 두짝보다 조금 큰 방을 한 달 28만원 물린대도 이보다 좋은 선택지가 없다니, 쪽방의 평당 임대료는 강남의 삐까번쩍한 집의 곱절에 달한단다.

이 방의 입주자는 이렇게 밝은 방은 처음 살아본다고 함박 웃었다. 이 집에 있는 동안 그는 다 터진 손가락도 보들보들해지고 먹고 싶었던 반찬도 여럿 만들어 먹었다. 그는 이곳이 '청와대 만큼 기운이 좋은 방'이라고 추켜 올렸지만, 부엌에 남은 음식을 방치한다, 관리인에게 차갑게 대한다는 등의 이유로 어느 날 방을 빼야 했다. 옮긴 건물은 계단이 가팔랐지만 간섭이 덜했고, 관리비 없는 26만원이었다. 해가 바뀌어 수급비가 오르자 집주인은 노인인데 걷기 어렵겠다며 1층 방을 주더니, 월세를 4만원 올려 30만원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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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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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필요가 박탈된 부족의 상태를 일컫지만 우리 사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안겨주는 것은 이것을 넘어 선다. 거절이나 실패, 실패에 대한 입증 요구, 나와 맞지 않는 규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작은 혜택. 이런 시간의 반복 끝에 얻게 되는 피로, 무기력, 그리고 단념하는 마음.

가난한 사람 외면말라. 밑바닥 인생도 삶이다. 이 작은 선언은 가난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최전선에 있다. 그대로 이해받아 본 적 없는 삶이 용솟음 친다. 더이상 단념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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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쪽방 주민들과 함께 쪽방의 무더위 소식을 다루는 티비뉴스를 보았다. 뉴스앵커는 창문조차없는 쪽방의 열악함과 더위, 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서 술을 먹는 사람들을 대조적으로 다루었다. 뉴스를 다 본 주민들은 잠시 침묵한 뒤 돌아가며 뉴스를 평했다.

"나도 처음 쪽방에 왔을 때는 술을 몰랐지만, 몸이 망가지고 쪽방에 들어와 수급자가 되어 살아보니 가장 어려운 일이 시간을 죽이는 것이더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우리 주민들의 심정도 알아달라."

"나는 술을 못 마신다. 가만히 있으면 울적해지기에 교보문고부터 남산까지 종일 걸어다닌다. 걸으면 피곤해서 잠도 잘 온다. 무릎만 괜찮으면 같이 걷자"

"나쁜 새끼들도 많지만 너희는 다 좋은 놈들이야. 사랑한다"

매주 모여 '쪽방주민 주거권을 보장하라' 외치는 우리들에게 쪽방관리자는 "보증금도 없는 새끼가 권리는 무슨 권리"냐고 큰 소리로 비웃었다. 임금을 협상해본 바도, 보험이나 복지의 울타리에 들어가본 바도 없이 주는대로 받고 시키는대로 일해온 세월은 차라리 억울하지 않았는데. 이런 모욕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주민과 연대자들이 한데 모여 외치는 '쪽방대책 마련하라'는 다른 말로 바꿔도 좋다. '너희가 내 삶을 아느냐', '가난하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각자 고유하다', '누구나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져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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