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지방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너무 추워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북의 먼 어딘가.
01_북의_먼_어딘가.txt#0869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 더 북으로 가면 말이야. 지도의 위로 쭉 올라가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더 가면, 거기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어야 하는 그 지점에서 놀랍게도 계속 땅이 이어지거든. 바다는 보이지 않고 하얗게 눈으로 덮인 산과 얼음 평원이 보여. 산에는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호수가 여러 개 있어. 분화구 같아 보이지만 안에는 차가운 얼음 조각들이 가득해. 산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나도 거기서 하룻밤을 머물게 돼. 말을 건네는 상대방은 보이지 않고 나는 목소리로만 있는 것 같다.
02_.txt#0870
경사가 가파른 산은 하얀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는데 마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은 나라 같아.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어슴푸레한 새벽이나 혹은 해질녘, 비탈에 드문드문 놓인 집들에서는 창으로 따뜻하고 밝은 빛이 흘러나와. 바깥에서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이들과 눈썰매를 타고 있어. 산 아래로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흰 지평선이 내려다보여.
03_.txt#0871
목소리를 따라 어느덧 장소는 눈 덮인 산의 도시로 바뀐다. 도시라고 하지만 이층이 넘는 건물은 없다. 나는 이곳에 오기까지가 얼마나 까다로웠는지 설명한다. 나는 아주 멀리에서 왔다. 산은 아주 높고 커다랬지만 눈으로 덮여있어 철도도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다. 어느 지점까지는 버스로 이동을 했고 또 어느 지점까지는 작은 차를 얻어 타야 했고 그 다음은 밧줄로 몸을 묶고 비탈을 올랐다. 이런 곳에 도시가 있다니 믿을 수 있겠어?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설마 그 도시가 이렇게 찾기 힘든 위치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도시는 유명하지 않았고 또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04_.txt#0872
나는 작은 이층집으로 들어간다. 경사에 지었기 때문에 아래층에도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고, 위층에도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는 집이다. 꿈 속에서 나는 늘 같은 집에 머물지만, 집의 주인은 갈 때마다 바뀌어 있다. 언젠가는 친구의 어머니였다가, 언젠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내가 묵는 방 안에는 작은 창이 있어 경사진 바깥 풍경이 잘 보인다. 산이지만 나무가 거의 없어 비탈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커다란 광장처럼 보이는 곳이다. 잘 다져진 눈 위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그곳은 관광지라 사진 찍기 아주 좋은 곳이에요.” 그는 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건네고, 나는 부츠를 신고 털모자와 카메라를 챙겨 골짜기로 간다. 이미 몇 번이고 가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꿈에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처럼 눈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도시는 전체가 일 년 내내 녹지 않는 눈으로 덮여있다.
05_.txt#0873
뾰족한 바위와 얼음으로 뒤덮인 골짜기에는 여러 개의 분화구 같은 구멍이 있다. 크기는 각기 다르지만 대략 지름 오십 미터 정도의 크기다. 저건 호수야. 누구도 그것을 호수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것을 호수로 알고 있다. 이상한 일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에 물 대신 얼음 조각이 채워진 호수들. 주변에는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이 있다.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은 기쁘게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뛰어다닌다. 이곳이 유명하게 된 이유는 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오로라 같은 빛이 흘러나오는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큰 구멍 앞에 선다. 아래로부터 천천히 흘러나오는 빛은 보라, 분홍, 때로는 연두, 그리고 검정에 가까운 파랑. 얼음에 반사되어 흩어지는 빛을 바라보다 나는 깨닫는다. 이곳에 아주 여러 번 왔었고, 이것은 내가 여러 날 반복해서 꾸고 잊는 꿈이다.
06_.txt#0874
나는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다. 오직 꿈이 시작되는 순간에만 기억하기 시작한다. 내가 얼마나 많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는지. 꿈에서 깬 다음에는 이곳을 완전히 잊어 기억하려는 시도조차 한 적이 없지만, 꿈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이전 꿈의 순간들을 가능한 한 자세하게 기억하려 애를 쓴다. 이곳에는 이미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다. 들이마시기 어려울 정도로 차갑고 깨끗한 공기, 발끝에 닿는 눈의 감촉, 이른 아침인지 저녁 무렵인지 알 수 없는 하늘. 나는 내가 있는 곳을, 꿈이 시작되자마자 알 수 있다. 왜 누구와 이곳에 왔었을까. 나는 내가 늘 머무는 방의 두껍고 울퉁불퉁한 흙벽과 유리창을 더듬으며 기억을 더 끄집어내고 싶어 한다. 꿈에서만, 이전 꿈을 기억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반복된다.
07_.txt#0875
그런 꿈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른다. 훅 내쉰 숨에 흩어진 보이지도 않는 티끌처럼, 꿈에서 깨어나면 그곳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러다 어느 날 공기 속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점 하나가 떠다니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처음에는 의식도 하지 못했던 그것이, 그러니까 무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08_.txt#0877
“어제 좀 이상한 꿈을 꾸었었던 것 같아.” “하나도 기억이 안나. 그런데 그게 굉장히 중요했던 것만은 기억이 나.” 의지로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세계의 한 점은 그 후로 드문드문, 몇 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이어지기 시작했다. “꿈 속에서 아주 먼 데 있는 어딘가엘 가.” “꿈에 같은 장소가 계속 나오는 것 같아.” “아주 낯익은 곳인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어.” “다시 꿈 속에서 그곳에 가게 되면 좋을 텐데, 그럼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 텐데.”
09_.txt#0876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꿈 속의 장소에 대한 기억의 조각을 몇 개 이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하얗게 눈으로 덮인 산과 얼음 평원이 보여. 산에는 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호수가 여러 개 있어...” 그렇게 북의 먼 어딘가에 대한 기억이, 꿈에서 깬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눈 앞에 떠다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곳이 정말로 있는 곳인지 확인을 하려는 것처럼 지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10_.txt#0993
11_사하_또는_야쿠티야_Republic of Sakha (Yakutia)1_googlemap.jpg
#0857
12_호수들_ozero_googlemap.jpg
#0860
13_호수들_ozero_googlemap.jpg
#0863
14_호수들_ozero_googlemap.jpg
#0859
15_호수들_ozero_googlemap.jpg
#0867
16레나강_삼각주Lena_Delta_satellite_NASA.jpg
#0856
17_랴홉스키_제도_New_Siberian_Islands_Aqua_MODIS_satellite_NASA.jpg
#0868
18_랴홉스키_제도_Relief_Map_of_New_Siberian_Islands_ru.wikipedia.org.png
#0854
이르쿠츠크에서 걸어서 에스키모들이 사는 곳까지 간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시베리아 철도 건설 현장의 자물쇠공이었다. 1893년. 그는 갑자기 먼 북쪽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미 태어난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와있었다. 그는 스무 살에 고향 모라비아를 떠나 바그레브, 제노바, 트리에스테, 보스니아, 세르비아, 루마니아를 지나 이르쿠츠크까지 왔다. 아주 먼 북극해까지 가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그곳에서는 누구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다. 그는 어느날 술집에서 북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북의 형무소에서 탈출한 정치범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계획을 듣고, 북극이 진정한 천국이라며 꼭 그곳에 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도망쳐 온 곳으로 떠나려는 사람에게 그들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바퀴가 두 개 달린 마차와 작은 말을 샀다. 지도를 볼 줄 몰랐지만, 계속해서 북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만은 알았다. 그는 집이 없었고, 죽더라도 슬퍼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9_얀_Jan.txt#0881
20_랴홉스키_제도에서_발견된_동굴곰의_미라an_Ice_Age_cave_bear_in_the_Lyakhovsky_Islands_North-Eastern Federal University_22000년_39500년전_추정.jpg
#0853
21_랴홉스키_제도에서_발견된_동굴곰의_미라an_Ice_Age_cave_bear_in_the_Lyakhovsky_Islands_North-Eastern Federal University_22000년_39500년전_추정.jpeg
#0858
22_노보시비르스크_제도_노바야시비리_섬_Остров_Новая_Сибирь.jpg
#0880
23_Andryushkino_googlemap.jpg
#0864
24_Andryushkino_북쪽_googlemap.jpg
#0865
그는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북을 향해 걸었다. 이 년째 되던 해에 마주친 사람들은 그의 목적지를 듣고 깜짝 놀라 만류했다. 지금까지 온 길은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지도 없이 오로지 해의 방향에 의지해 걸었기 때문에, 너무 자주 길을 잃고 이상하게 먼 길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길을 헤맬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25_얀_Jan.txt#0910
26_숲의_가장자리_라고_번역되는_마을_Край Леса_googlemap.jpg
#0862
27_숲의_가장자리_마을_근처_googlemap.jpg
#0861
28_야쿠티야의_어느_바닷가_지도에는_버려진_배_사진만_있다_somewhere_yakutia_googlemap.jpg
#0855
29_야말_반도_영구동토층이_녹으면서_생긴_구멍_2014_Vladimir_Pushkarev_Russian_Centre_of_Artic_Exploration_Reuter_photo_야말은_세상의_끝이라는_뜻이다.jpg
#0887
30_Andryushkino_Voices_from_the_Tundra.jpg
#0866
<툰드라의 목소리들>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언어학자인 세실리아는 암으로 곧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북으로 떠난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북에서 유카기르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해두려고 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살 땅을 잃고 언어를 잃고, 도시로 강제 이주되거나 남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사람들은 700명. 그 중에 63명만이 자신들의 말을 할 줄 안다. 나는 유카기르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며칠이고 지도에서 들여다본다.
31_.txt#0911
32_Voices_from_the_Tundra.jpg
#0888
../